력사전환기속 성내 조선족지역사회 탐방 [철령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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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12회 작성일 2015-07-01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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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교육 특색으로 도약을 꿈꾼다

작성자: lnsm003 날자: 2015-6-29 

 

력사전환기속 성내 조선족지역사회 탐방 [철령편]

  

  철령은 우리 성의 북부에 위치해있는 도시로 이 지역에는 료하, 청하, 채하 등 18래의 강이 흐르고 험준하고 경치가 수려한 산이 많으며 또한 수자원이 풍부하다. 철령지역에 조선인이 정착한지도 백년이란 유구한 세월이 흘렀다. 한일합방과 더불어 일제의 잔혹한 탄압과 압박에 못이겨 살길을 찾아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이주한 조선의 피난민들과 잃어버린 나라를 찾으려고 일떠난 반일의사들이 철령지역에 정착하면서 철령조선족력사가 시작된다. 력사기재에 의하면 일부 조선인들이 1918년부터 철령 사타자(현재의 철령현 요보진 사타자)와 개원의 동부산지 및 서풍산골에 들어와서 초가집을 짓고 화전을 일구면서 살기 시작하였다. 

 

  장장 백년이 넘는 세월속에서 철령조선족은 여러 형제민족과 함께 철령의 개척자, 건설자, 력사견증자로 살아왔으며 특히 21세기초 새로운 력사전환기를 맞으며 자체의 개성과 특색으로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만방에 널리 알리고있다. 

 

  "철령조선족사회의 산증인”으로 불리우는 박병대로인(흑룡강태생으로 1963년부터 개원으로 이주해 개원조중, 철령조중에서 교편을 잡음)은 “초기 조선인들은 철령지역의 산간지대에서 살았는데 후에 철도부설과 수전이 개발되면서 점차 평원지대로 이주했다”며 "철령조선족은 료북지구의 수전개발과 농업생산의 발전 및 항일전쟁, 해방전쟁과 사회중의혁명과 건설사업에서 타민족에 못지 않는 중대한 기여를 하여 철령력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남겨놓았다."고 소개한다.

 

80년대만 하여도 철령조선족인구는 2만 3,000여명으로 성내 심양, 무순 다음으로 세번째로 조선족이 많은 지역이였다. 그러나 개혁개방과 출국로무바람이 일면서 철령조선족인구는 급감하여 현재로 1만 8000여명으로 집계되고있는데 호적을 기준으로 한 통계여서 실제로 조선족인구는 더 적다는것이 절령조선족들의 말이다. 현재 철령조선족은 주로 철령시 은주구(채하동촌 포함)와 청하구의 동화촌, 신흥촌, 개원시내와 개원의 소구사, 의화툰, 우의촌, 청풍촌, 조광촌과 로성 남관, 그리고 철령현의 우의촌(원 사타자촌), 포동촌 등 조선족마을에 집거해있다.

 

2000/2010 철령조선족인구분포상황      단위

 

은주구 

청하구 

철령현 

서풍현 

창도현 

조병산시 

개원시 

총인구 

2000 

4,650 

1,311 

4,323 

691 

598 

745 

6,989 

19,307 

2010 

5,345 

1,000 

3,487 

565 

393 

636 

6,631 

18,057 

    

        

  유구한 력사와 더불어 

  

 

 

  철령에는 우리 민족과 관련된 명소도 많은데 그중 성자산고구려산성과 개원 위원보고구려산성이 아직도 옛모습을 잃지 않고있으며 명조때의 철령위를 거쳐 료둉총병을 지낸 리성량과 임진왜란때 조선에 출병하여 평양성을 수복하고 일본군을 한강이남으로 몰아간 조명련합군의 도독 리여송(리성량의 아들) 부자의 산소도 철령 최진보에 남아있어 관객들의 발길을 끌뿐만 아니라 력사학자들이 꼭 찾아보는 명소로 되고있다.

  철령에는 또한 조선족의 자랑스런 인재들도 많이 있다. 그중 항일전쟁시기 동북항일련군의 고급지휘원 허형식장군도 철령지구에서 자라 혁명투사로 성장했고 중국인민해방군의 정순주장군과 림룡복장군도 철령에서 태여나 혁명에 참가하였다. 철령은 또한 동북항일련군의 근거지로서 수많은 혁명렬사들의 영령이 잠들어있는 곳이다. 철령에는 해방전쟁시기 철령과 개원을 해방하는 치렬한 전투에서 영용하게 희생된 조선인부대-중국인민해방군 원 166사(리홍광지대) 렬사들을 모신 룡수산혁명렬사비가 있는데 리홍광장군의 조각상과 원 166사 렬사들의 사적이 기재되여있다. 이 렬사기념비는 성내 여러 조선족단체와 개인들의 기부금으로 1999년 9월에 세워진것이다. 또 철령 웅관툰진 조가구에도 이 지역에서 희생된 원 166사의 20명 렬사들의 유골을 안장한 혁명렬사릉원이 있다.  

 

  유구한 력사를 갖고있는 철령지역에는 조선족영재들도 수두룩하다. “철령조선족발자취”(2014년 출간, 료녕민족출판사)에 실린 철령조선족인물록을 보면 새중국창립전에 혁명에 참가한 로간부들로는 김광옥, 원용구, 김일홍, 김기영 등 4명이고 각 분야에서 활약하고있는 영재들과 인민대표, 로력모범, 선진사업자가 모두 42명이다. 그중 대표인물로는 전 철령시석유회사 당위서기 조동, 서풍현 현장 강관화(성인대대표), 철령시조선족문화예술관 관장 김영주("무형문화재보호사업일군"), 철령시조선족고급중학교 교장 안경석("창신형교장"), "조선족탈춤” 국가급전승인 한규승, 료녕성조선족민담전승인 박병대, “조선족탈춤” 료녕성대표전승인 리영호, 료녕성무형문화재전승인 김례호, 전 철령시공안교통지대 은주1대대 교통경찰 리상남(“료녕성 가장 아름다운 경찰”) 등이다. 

 

  현재 허다한 조선족촌이 이름만 남아있을뿐 실지 거주하는 조선족인구는 얼마 안된다. 일례로 한때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큰 조선족동네였던 철령현 요보진 사타자촌은 인구가 고봉기에 1,200여명이나 되였지만 현재는 70~80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조선족이 집중되였던 개원에도 현재는 8개 조선족촌이 있지만 동네에 살고있는 조선족은 로인과 애들뿐이란다. 

 

  70~80년대 조선족이 살고있는 동네마다 거의 조선족소학교가 있었는데 1984년의 통계에 따르면 철령지역의 조선족학교수는 35개였지만(당시 조병산시와 창도현에도 조선족소학교가 있었음) 현재는 철령시조선족고급중학교와 철령시은주구조선족소학교, 개원시조선족중학교와 개원시조선족소학교, 그리고 철령현우의조선족중심소학교 5개뿐이다. 철령현우의조선족중심소학교는 현재 교사 3명에 유치원생 4명, 소학생 4명으로 심각한 생존위기에 처해있다. 

 

  조선족민간단체로는 철령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와 그 산하의 철령시조선족기업가협회, 철령시조선족음식문화협회 및 철령시조선족로인협회(산하에 은주구조선족로인협회와 개원시조선족로인협회 및 조선족농촌의 기층로인협회)가 있는데 철령지역 조선족문화행사는 철령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와 철령시조선족문화예술관, 철령시조선족고급중학교가 주축으로 되여 여러 조선족학교와 조선족로인협회들의 적극적인 동참으로 치뤄지고있다. 2012년 9월 15일에 철령에서 제6회료녕성조선족민속절이 성대하게 개최된바 있다.  

 

  철령시의 조선족간부수도 엄청 줄어들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 조선족로간부들이 륙속 물러나며 지금 철령시에는 조선족간부수가 급감하고있다. 현재 16개 시위 직속기관과 25개 향진기관에 조선족 부과장 이상 간부가 1명밖에 되지 않으며 46개 시정부 직속기관과 20개 시정부 직속 사업단위에 조선족이 6명밖에 되지 않는다.  

 

  조선족 인대대표와 정협위원도 그리 많지 않다. 불완전통계에 의하면 철령시에 인대대표가 8명, 정협위원이 2명인데 그중 성인대대표와 성정협위원이 각 1명, 시 및 구인대대표가 7명, 시정협위원이 1명이다.

 

  철령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조동회장은 “조선족간부가 적은것도 문제지만 인대대표와 정협위원이 날로 줄어들어 공개적 장소에서 조선족사회의 발언권이 적어지는것이 더 걱정스럽다.”고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냈다.

  료녕성조선족교육의 "산실" - 개원조중

 

  개원조선족중학교 하면 많은 사람들은 료녕성조선족교육의 "산실"이란 개념을 쉽게 떠올릴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과 함께 탄생한 개원시조선족중학교는 50여년간 료북지구의 문화중심으로 나라를 위해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을뿐만 아니라 조선족교사들을 양성하여 성내 여러 조선족중소학교에 수송하였다. 아직도 성내 여러 조선족중소학교들에는 개원시조선족중학교 사범반 출신의 골간교사들이 적잖다. 

 

  "우리 개원시조선족중학교가 걸어온 길은 간고하고 휘황하면서도 굴곡적이다."라는 개원조중리영홍교장의 말에서 굴곡이 많았던 철령조선족의 교육과 더불어 철령조선족의 삶의 력정을 엿볼수 있다. 또한 21세기 새로운 력사전환기속에서 단순한 학교의 운명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교육과 삶의 공간을 포함한 우리 민족의 존립에 대해 깊이 사색케 하는 기회도 찾아본다.  

 

  개원시조선족중학교는 명실공히 철령조선족교육의 하나의 굵직한 명맥이였다. 1949년 8월 15일에 료북지역에서 고고성을 울린 울린 료서성개원조선족중학반은 그해 12월에 철령현사타자조선인민중학과 통합하고 학교명칭을 료서성개원현조선중학교로 고치였다. 학교도 개원현조선소학교 자리로 이전하고 1951년부터 사범반(사훈반)을 모집하기 시작하였다. 1954년에 료서, 료동 두성이 통합되면서 료녕성으로 되자 교명을 료녕성개원현조선족중학교로 개칭하였다. 1959년에 료녕성 반산과 길림성 리수현의 두 조선족중학교가 개원현조선족중학교와 통합되여 학생이 증가되였다. 학생수가 가장 많은 시기는 1953년과 1954년으로 천여명이 넘어섰었다. 1955년과 1956년에는 고중생들이 심양시조선족제1중학교로 옮겨간적도 있었다. 

 

  1980년이후 완전중학교로 되여 학생수가 증가되기 시작해 1996년 철령에 독립고중이 서기전까지만해도 학생수가 850~885명에 달하였다.

  1953년에 부설한 사범반은 1973년 10월 성교육국의 결정에 의해 료녕성개원현조선족사범교가 정식 설립되면서 개원현조선족중학교는 22년간의 부설사범반의 려정을 결속지었다. 그에 앞서 청원현조선족사범학교가 1954년에 개원현조선족중학교 사범반과 통합되였다. 1976년에 료녕성개원현사범학교는 철령으로 이전해 철령조선족사범학교로 개칭하였고 1982년 심양으로 이전하면서 료녕성조선족사범학교로 개칭했으며 2013년 부신몽골족사범학교와 통합되여 현재는 료녕민족고등전과학교로 개칭하였다. 

 

  1996년에 철령시조선족고급중학교가 철령시에 세워지면서 독립초중으로 되여 학생수가 급감하였고 2014년 정부의 철거명령이 떨어져 다시한번 풍파를 겪게 된다. 개원시조선족소학교와 길 하나를 사이두고있으면서 개원시내 조선족사회중심을 이루었던 개원조중이 건물철거명령을 받게 되자 조선족사회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가뜩이나 학생수가 줄어들어 학교운영이 어려운데다 시내를 벗어난 지역으로 이전하면 소학교와 갈라져 학생수가 더 떨어지는건 불보듯 뻔하고 또 개원시내에 조선족사회중심이 사라진다는 생각에 우리는 무조건 반대했수다. 그러나 어떻게 정부를 이겨요. 끝내 타협했고 학교는 정부가 계획한대로 새로운 곳으로 이전했수다." 개원시조선족로인협회 박태규회장은 그때 일을 상기하며 당시 로인들이 반대해나서는바람에 학교지도부와 일부 충돌도 있었다고 했다. 

 

  "그땐 우리도 울며겨자먹기로 정부와 협상하면서도 정부의 의견을 좇을수밖에 없었는데 지금돌이켜보면 조선족사회에서 반대해나서는바람에 운영자금이나 학교운영시설방면에서 정부의 많은 혜택이 돌아온것 같아요." 리영홍교장도 감개무량해 이렇게 운을 똈다.

  "밝게 맑게 곱게 곧게"는 학교정문에 큼직하게 씌여진 교훈이다. 한문투보다 우리 말의 우수성과 풍부성을 살려 일신한 학교의 모습에 걸맞게 순 우리 말로 고안해낸 교훈이다. 빈수신성에 부지 3만 3,00여평방메터, 건축면적이 8,700여평방메터에 자금 3,000만원을 투자하여 건설한 개원시조선족중학교는 신축교사에 기숙사, 그리고 선진적인 교학시설이 갖춰진 일류학교로 새로운 모습을 드러냈다. 

 

  2014년 교사절을 맞아 조선족인사들과 각촌 촌간부, 학부모, 로인협회 등 약 200명을 초청해 신축교사 락성식을 가졌고 2015년 5월 15일에는 개원조중에서 성내 여러지역 조선족단체장들과 철령지역 조선족학교, 협회 관계자들이 대거 참가한 가운데 20여년만에 개원시조선족민속운동회를 성황리에 펼치기도 하였다.

 

  개원조중은 창립되여 철령조중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성정부의 청급간부와 석사, 박사, 교수 등 적잖은 조선족인재를 배출하였다. 50년대 졸업생들로 전 료녕성민위주임 장현환(현 료녕성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리사장), 북경찦차유한회사 집행위원회 주석 리연수, 대련간부관리학원 당위서기 장현수와 전국인대대표 김죽화, 성특급교사 정기준이 대표적이다. 1970~1980년대 졸업생으로는 우종렬(퇴직), 박종덕, 김희성, 김영섭 등은 성인대, 성수리청, 성정보경제연구원, 철령시검찰원 등 기관에서 정처급이상 직무를 맡고있다.       

 

  철령조선족교육의 "기적"

 

  최근년에 철령조선족교육,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철령시조선족고급중학교가 일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성내 여러 지역의 조선족인구판도가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족농촌인구는 급격하게 감소되고 학생래원이 엄중하게 부족되면서 조선족학교의 페교현상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이러한 준엄한 현실에 직면하여 여러 학교들에서는 각자의 우세와 자체의 특점에 립각하여 학교를 살리는 길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안경석교장을 대표로 하는 철령조중 령도들은 과감하게 "선참으로 게를 먹는 사람"이 되여 십수년간의 간고한 노력을 거쳐 철령조중을 철령시뿐만 아니라 료녕성 내지는 전국에서도 인정하는 특색학교로 탈바꿈시켰다.  

 

  "처음 한족보통반을 설치했을 때 당시 학부모들은 물론 철령조선족사회에서도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지어 교사들까지 학교를 한족학교로 만드냐며 반신반의했습니다." 안경석교장은 조선족학생만으로 갈수록 학교를 유지하기 힘들다는 판단하에 1998년부터 한족학생을 받아들이기 시작, 학생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주고 신심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한편 부단히 교수질을 높여 이들이 대학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게 하였다. 2010년 대학입시에서 본과이상 대학진학률(예술류를 제외)이 50%에 달했다. 그러자 조중을 찾는 한족학생들이 늘어나기 시작해 현재는 철령1중 아니면 2, 3 중을 찾는것이 아니라 조중을 찾는다고 한다. 

 

  또한 지난 2007년부터 한국류학생을 모집하였는데 올해에도 2명이 청화대학에, 1명이 인민대학에 진학하였다. 

 

  현재 철령조중은 30개 반급중 조선족학생외 한족보통반이 9개, 한족한국어반이 6개, 한국류학생반이 5개로 학생수가 도합 1,000여명을 웃돌고있다. 그만큼 대학입시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을뿐만 아니라 한국의 여러 명문대와 국제교육협력관계를 맺고 쌍방간 류학인원을 교환하였는데 이 몇년사이 80여명의 학생들이 한국에 류학하였다. 졸업후 이들중 일부는 한국에서 직장을 찾고 일부는 국내 한국회사에서 근무할수 있는 기회를 가질수 있다. 

 

  학생래원이 넓어지면서 학교의 사회수익과 경제수익이 올라갔고 교사들의 사업열이 높아지면서 교학수준도 향상되여 대학입시에서도 첩보가 련이어 날아들어왔다. 2011년 대학입시에서 리상휘학생이 철령시와 료녕성조선족수험생의 리과수석을 차지했고 2014년 김설정학생이 철령시문과수석을 차지했다. 최근 십년간 10명을 북경대학에, 1명을 청화대학에 수송하였으며 많은 우수한 학생을 남경대학과 인민대학, 복단대학, 절강대학 증 중점대학에 수송하였다. 

 

  "국제화, 정품화, 다원화"로 학교를 꾸려 다방면의 인재를 양성하는 철령조중의 특색발전모식은 성교육계에서 인정을 받아 철령조중은 2012년에 첫패의 "료녕성특색보통고중실험학교"에 진입하였는데 철령시적으로 유일하며 전 성 16개 특색고중중 유일한 민족학교이기도 하다.

  또한 2013년 12월 4일, 신화망에서 주최하는 2013년 신화교육포럼-"대국교육지성(大國敎育之聲)"활동에서 안경석교장은 "창신형교장"으로, 쳘령조중은 "기초교육특색학교"로 선정되였다. 

 

  "속으로는 조선족학교를 한족학교로 만들지 않느냐 하는 로파심이 앞서면서도 학교를 살리기 위한 막부득이한 길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위안이 됩니다만 조선족학생이 날로 줄어들어 마음이 항상 무겁습니다." 안경석교장의 속심말이다. 

     

   

  민족문화유산은 우리의 소중한 자산 

 

    철령에 가면 거의 매일 우리 민족의 복장차림새로 노래와 춤연습에 열을 올리고있는 로인들을 보게 된다. 어느 로인협회의 활동실로 착각할수도 있지만 철령 룡수산기슭에 위치한 철령시조선족문화예술관에서 볼수 있는 흥겨운 정경이다. 

 

  철령시조선족문화예술관은 1984년 6월 2일에 설립되였지만 아직도 자체의 단독건물이 없이 철령시군중문화예술관의 건물에 얹혀 살고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곁방살이를 하면서도 민족의 문화전통을 전승해나가기 위해 이처럼 땀동이를 쏟고있는것이다.  

 

  "옛날에는 눈물뿐"이라며 김영주관장이 곁방살이의 서러움을 한마디로 토해냈다. 자체의 청사가 없어 여러가지 문화행사를 하자니 어려움도 많이 따랐지만 문화관 관원들의 마음이 흩어져 떠나기 시작해 2005년말에는 김관장과 한족관원 두사람만 남았다고 한다. 백여평 되는 실내에 세사람만 남아 한산하기 그지없었지만 당시 조선족고중과 기업인들이 뜨러운 손길을 내밀어주어 한가닭의 희망이라도 가질수 있었다고 한다. 2006년초에 관장으로 취임한 김영주는 국무원에서 발표한 무형문화재 관련 문건을 뒤늦게 읽어보고 여기서 문화관의 재생의 길을 찾았는데 현재까지 조선민족문화유산을 깊이있게 발굴하여 도합 7개를 국가급, 성급, 시급 무형문화재로 등재시켰다.  

 

  조사연구에서 재료수집, 전승인선정, 항목신청, 전승...  말그대로 무형문화재등재는 하나의 고된 작업이면서도 보람있고 의미깊은 일이라 할수 있다. 당시 철령현 요보진 사타자의 탈춤이 유명했는데 대표전승인 한규승(당해 82세, 작고)은 철령에 조선족소학교를 세웠고 또 조선민족의 탈춤을 전승해오면서 철령현우의촌로인협회를 활성화시키기도 했다. 김관장이 한규승로인과 손잡으면서 1호 무형문화재 "철령조선족탈춤"(시급)이 탄생되였다. 후에 국가급으로 신청하면서 "조선족농악무(탈춤)"으로 명칭이 바뀌였는데 여기에는 탈춤외 학춤, 상모춤이 포함되여 춤판을 펼치면 그야말로 가관이다. 

 

  9년동안의 끈질긴 노력끝에 철령시조선족문화관에서는 “조선족농악무(탈춤)"(2008년)”, “판소리"(2011년), “조선족추석명절"(2014년)”등 3개 항목을 국가급무형문화재로, "철령조선족민담"(2009년), “조선족전통혼례"(2015년) 등  2개 항목을 료녕성급무형문화재로, “조선족상원절"(2010년), “조선족단오명절"(2015년) 등 2개의 항목을 철령시급무형문화재로 등재시켰다. 

 

  "무형문화재는 수백년 혹은 수천년을 거쳐 우리 민족 선조들이 대를 이어 전해내려온 민족의 소중한 자산입이다. 따라서 시급에 등재된 무형문화재를 성급으로 성급을 국가급으로 업그레이드시키고 전승, 보급하는것이 더 중요하지요." 김관장은 문화관의 양성, 창작, 활동, 연구 4개의 중심을 조선민족의 문화유산 발굴을 통한 무형문화재의 등재와 전승에 두어 문화관 관원뿐만 아니라 철령지역 조선족로인협회와 조선족중소학교에서 동참하는 활동으로, 조선족사회의 화합과 분발향상을 도모하는 행사로, 나아가 조선족사회의 위상을 주류사회에 과시하는 장으로 만들었다.      

 

  철령시문화국의 비준을 거쳐 철령시은주구조선족소학교를 "조선족농악무교학기지"와 "조선족민담교학기지"로, 철령시조선족고급중학교를 "조선족농악무(상모)교학기지"와 "판소리교학기지"로, 개원시조선족소학교를 "조선족민담교학기지"와 "조선족농악무교학기지"로 지정하였으며 문화관에서는 박병대, 김례호, 리영호 등 전승인들을 모시고 중소학교들에서 활발하게 보급활동을 벌여왔다. 개원시조선족로인협회는 다년간 전통문화공연으로 우리 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데 기여가 커 지난해에 개원시정부로부터 “개원시조선족민족문화전승기지”로 지정되였다.  

 

  이러한 무형문화재들은 시급행사외에도 성급행사에 전시되였는데 "조선족농악무"는 심양 전국체전 당시 무형문화재전시에서 전시돼 호평을 받았다. 

 

  철령시은주구조선족소학교 정조홍교장은 "전국체육예술'2+1' 항목공개세미나에서 우리 학교의 농악무는 중앙교과소의 전문가와 회의에 참가한 령도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어요."라고 자랑스레 소개했다. 

 

  현재 철령시조선족문화예관은 성내 무형문화재등재항목이 가장 많은것으로 유명하다. 

 

  "문화가 살아야 우리 민족이 살수 있습니다." 철령시조선족문화예술관은 국가재정부에서 조달받은 무형문화재 보호경비에서 전시적인 문화행사는 물론 여러 중소학교와 로인협회에도 수십만원의 자금을 내여 악기나 장고, 북, 상모, 복장 등을 사주고 또 이동형 음향설비를 사주어 철령조선족의 문화생활을 풍부히 하고 조선족사회의 위상을 높이는데 한몫을 하고있다.

  우리는 취재에서 철령조선족사회는 성내 여타 지역보다 조선족경제기반이 취약하지만 문화와 교육의 특색으로 전반 조선족사회에 활력소를 주입해 생기를 되찾아 “철령현상”으로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선을 이루고있음을 기쁘게 보았다.  

 

  한편으로 “단 한명의 학생이 있더라도 학교를 지켜나갈것입니다.”라는 철령현우의조선족중심소학교 최연실교장의 말과 “민속촌을 꾸려서라도 조선족촌을 유지할것입니다.”라는 개원시 팔보진 청풍촌의 김흥문서기의 말이 계속 가슴 한구석을 파고들었다.   기자 오지훈 최수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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