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사회의 변화와 여성의 역할(박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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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114회 작성일 2005-12-18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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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사회의 변화와 여성의 역할 연변가정연구소 소장 박민자 1. 머리말 중국의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은 커다란 개혁의 물결에 휩싸이게 되였다. 모국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접하게 되면서, 모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하였고, 조선족은 다른 민족에 비해 더욱 더 급격한 사회변화를 맞이하게 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족 여성은 한민족 여성의 끈질김과 강인함을 발휘하여 제일 먼저 산업현장에 뛰어 들었고, 많은 조선족 여성이 경제생활을 위해 한국에서 일하게 되였다. 과거와는 달리 조선족 가정생활은 다양한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와 더불어 조선족 여성들의 의식은 상당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였다. 조선족 여성의 경제력이 향상되고 사회활동이 증가하면서 여성들은 점차 자아를 추구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가부장적 의식은 점차 파괴되어 가고 있다. 과거에는 수치스럽게 여겨졌던 이혼이 감정이 맞지 않으면 쉽게 헤어질 수 있다는 관념으로 변화하고 있다. 성해방은 진보된 문명의 한 표현으로 여겨지며, 돈이나 권력이 있는 남자들이 애인을 찾아 즐기고, 돈 있는 여자들은 젊고 능력 있는 남자들을 유혹하는 등의 제3자현상이 점차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조선족 여성의 의식변화는 출산관념의 변화에서도 나타나 대부분의 조선족 여성은 아들, 딸 구분하지 않고 하나만 낳으려 하고 심지어는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비둘기 부부까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출산관념의 변화는 90년대 초부터 연간 마이너스성장의 주 원인이 되고 있다. 이는 중국 내 조선족의 지위를 위협하는 중요요인이 될 수 있다. 여성해방과 남녀평등 문제에서 의식면에서나 실제생활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족 여성들은 50~60년대에 단순하게 사회진출에서의 평등한 권리를 추구하던 데에서 80년대에는 보다 높은 차원에서 여성의 진정한 평등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사람들의 머리 속에 깊이 뿌리내린 가부장적 남존여비사상은 여전히 의식, 무의식속에서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고,1 이 과정 속에서 남성과 여성의 가치관 차이로 인한 갈등이 유발되고 있다. 조선족 사회의 변화 그리고 여성의 변화와 관련된 일련의 문제들이 빈번해지자 중국 부녀들은 이에 대한 논의를 위해 2003년 8월 22일, 북경에서는 제9차 중국부녀대표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는 새로운 세기에 진입한 중국부녀들이 첫 번째로 맞는 대회이기에 그 의의가 자못 중요하였다. 대회기간 전국 방방곳곳에서 모여온 각계각층 대표들은 여성들의 공동관심사 즉 험준한 취업형세, 하강된 참정비례, 다층 충돌이 발생한 혼인가정 영역, 피해 받고 있는 여성 권익 등 존재한 문제를 제시하고 중국부녀해방이 구경 어느 정도인가, 부녀발전이 구경 무슨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어떤 이론의 지지가 필요한가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방향을 제시하였다. 최근 조선족의 국적 문제에 대한 한국정부의 입장으로 인해 조선족 사회는 개혁개방 초기와는 다른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한국정부에 의해 중국으로 떠밀린 조선족들은 한국과 조선족 사회의 사회, 경제, 문화적 차이를 느끼고 있고, 오랜 기간동안 떨어져 있다 다시 재회를 한 가족들과의 심리적 부적응을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갈등이 심화되면서 가족문제의 발생, 이혼의 증가 등이 발생되고 있는데, 앞으로도 이러한 변화양상은 더욱 증가할 것으로 보여, 사회변화에 따라 여성들이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인가가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우리가 부딪친, 부딪치고 있는 문제는 어디까지나 변화를 이해하고 수용하는데서 발생하였다고 인정하므로 조선족사회의 변화를 유발한 국내환경과 국외환경을 인식하고, 변화속의 중국조선족 여성의 현상태를 분석하고 조선족 여성의 역할을 제시함으로써 조선족 내에 발생하는 문제 해결에 일조하려 시도한다. 2. 조선족사회의 변화를 유발한 국내환경 당대중국은 1978년 11차 3중 전회를 계기로 세 차례의 «사상해방»단계를 거쳤다. 첫 번째 사상해방은 이른바 1978년-11차 3중 전회를 계기로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은 실천»이란 진리를 인식함으로써 «두 가지 무릇»사상을 전승하고 개인숭배란 커다란 보따리를 벗어던졌고 개혁개방의 길에 성큼 들어선 것이다. 두 번째 사상해방은 1992년 14차 당 대회를 계기로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의 오리무중을 헤치고 계획경제숭배의 틀을 짓부시고 시장경제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세 번째 «사상해방»은 1997년-15차 당 대회를 계기로 «공유제냐, 사유제냐»의 논쟁에서 해탈됨으로써 사회주의공유제 숭배론에서 자유로워진 것이다. 이러한 사상해방의 3단계를 통해 20여 년간의 실천과 모색, 간난곡절을 겪고 지어 침중한 대가를 치른 후 근로, 소박한 중화민족은 드디어 그렇게 소박하고 간단하면서도 위대한 진리를 터득하게 되였다. 즉 인간의 기본 수요는 «배불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나라의 온정과 안전, 국제상에서의 지위와 영향력 등은 한 나라의 경제실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사회제도의 우월성은 최종적으로 그 제도가 고도로 발달한 사회생산력을 창조할 수 있느냐에 의해 검증된다는 것이다. 세 차례의 «사상해방»을 통하여 중국사회는 심각한 변화를 일으켰는바 사회계층의 변화는 중국사회형태의 변화와 경제발전제도를 전변시킨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다. 3 농업노동자들이 육속 기타 사회계층에로의 유동으로 말미암아 농업노동자계층을 점차 축소시켰고 상업봉사자일군들의 수가 늘어나게 하였으며 산업노동자 대오가 농촌공업화로 말미암아 눈에 띄게 늘어나게 하였다. 사회중간계층을 신속히 확충시킴으로써 중국사회계층결구를 재래의 <금자탑>형으로부터 <럭비풋볼>형으로 전변시켰으며 경제자원을 장악하고 경영하는 계층을 점차 흥기시키고 장대시켰다. 중국 대환경의 거대한 변화는 신생사물에 민감한 조선족의 재래의 사고방식을 여지없이 뒤흔들어 놓았다. «소수민족정책»이라는 «그늘»밑에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시장경제»란 «땡볕»에 드러나 갈팡질팡하게 된 것이다. «잘 살아야 한다»는 이유 하나로 농민들이 «조상들이 땀으로 개척하고 눈물로 걸구고 피로 지켜낸 땅»을 버리고 대거 도시로 흘러들었다. 농촌인구의 도시진출로 말미암아 재래의 집거구 해체 및 자녀교육문제가 대두되였고 농촌 여성들의 도시진출로 인기된 «성비례 파괴와 농촌총각 장가난 문제», «여성을 잃는 문제»가 매스컴에서 심심찮게 들먹거리기 시작했다. 개혁개방 특히 80년대 말부터 농촌 처녀들이 대량 도시에 진출하거나 외국 노무로 떠나버리는 통에 농촌에는 처녀가 없어 총각들이 결혼하지 못하는 현상이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멀쩡한 총각이 아이까지 달린 과부와 결혼해도 모두가 부러워할 정도로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물론 중국조선족은 중화민족의 당당한 일원으로 여느 소수민족보다 앞장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치부의 길»에서 혁혁한 성과를 이룩하고 «먹는 문제»를 기본상에서 해결하였다. 이는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3I. 조선족사회의 변화를 유발한 국외환경 우리 중국조선족의 문화는 그 뿌리를 한반도에 두고 있음은 부인할 수가 없다. 조상의 무덤이 그 땅에 있고 그 땅의 광복을 위해 만주벌판에서, 백두밀영에서, 태항산에서, 상해 등지에서 피 흘리고 쓰러져 이제는 이 땅의 한줌의 흙으로 된, 우리 민족의 반일투사와 항일영웅 그리고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이 땅에 뿌리고 지금은 묘비도 봉분도 없는 고총속에 누워있는 무명열사들의 유지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고 그 영혼이 아직 안식처를 찾지 못했음을 가슴아파하는4 그 후대 중국조선족 2,3세의 생존과 건재로 하여 뿌리의식은 조만간에 소실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조선족은 근 반세기나마 그 뿌리를 가슴에만 묻고 살지 않으면 안 되였다. 가고파도 갈수 없는 고향, 가고 싶다는 말조차도 꺼내기 두려운 모국이였으니까.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조선족은 모국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접하게 되였다. 그동안 식민자본주의로 인식되였던 한국이 «아세아 4마리 용»중 한 마리로 부상되여 있었고 조선(造船)은 세계2강, 자동차생산은 세계5강 행렬에 서있었다. 정치적 원인으로 위축되여 있었고 가난한 형제인 조선 때문에 주눅이 들었던 중국조선족들은 우선 부자형제인 한국이 있는 것 때문에 공연히 목소리가 커졌고 어깨도 으쓱 올라갔다. 80년대 중반 한국은 중국조선족에게 «친척방문»의 길을 열어주었다. 더없이 발전된 모습으로, 너그럽고 진지하게 다가온 한국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며 진한 동포애를 보여주었고 중국조선족의 민족적 자존심, 자신심과 자부심을 한껏 부풀려주었다. 친척방문으로 물꼬가 트인 중국조선족의 모국진출은 가난의 때를 벗지 못한 중국조선족들에게 물질적 풍요로움을 안겨주었다. 전 연변사회과학원 김종국 원장은 «세기교체의 시각에서 본 중국조선족»이란 저술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최근 10년간 연변에서는 8만 여명이 한국나들이를 하였는데 그중 90%이상이 약장사, 품팔이와 기타 도경을 통해 외화를 벌어왔다. 한사람이 평균 3천불을 벌었다고 한다면, 2.4억원의 외화를 수입한 셈이다. 한 가정을 네 식구로 가정한다면 한국나들이 덕분에 30여만 조선족이 유족하게 된 셈이다.» 1996년 연변의 외화 저금액은 6천여만 달러에 달했다. 1998년부터 2002년말까지 연변 해외인력송출 외화수입은 도합 12억달러로서 전주 재정수입을 초과하였다. 그중 2002년의 외화수입은 4억 7700만 달러로서 2001년 전주 재정수입의 2배에 달했으며 2003년 9월말까지의 외화수입은 4억 5000만 달러에 달했다.5 이에 김종국 원장은 «연변이 전국 소수민족지구와 길림성내에서 가장 부유한 지방으로 된 데는 <한국나들이>덕이 크다고 본다»고 지적하였다. 모국진출로 중국조선족들은 몸소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체험하고 배우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비록 «불법체류자»여서 «까마귀»대접을 받지만 어쨌든 생산현장에 투입된 만큼 선진적인 문화와 생산방식, 생활방식을 체험하는 과정에 경영방법을 터득하게 되였고 시장경제하에서의 품질의식, 효율의식, 경쟁의식을 구비하게 되였다. 이는 그들이 귀휴 후에 시작한 경영활동에서 좋은 경험으로 작용하게 되였다. 동시에 자본주의시장경제하에서의 노무행위로 말미암아 중국특색사회주의시장경제를 이해하고 적응하는 능력도 일약 제고 되였다. 예컨대 지난날 가라지나 돌피를 잘 가려내 «감농군»이란 호칭을 가졌던 농민이 한국을 다녀오더니 «능률이요, 고속성장이요, 형평이요, 안정이요, 국제수지흑자요, 생활여건이요» 등등 단어들을 술술 주어 댈 수 있도록 견식이 늘어 난 것이다. 모국진출은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를 계승 발양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일으켰는바 소실 되여 가는 문화재를 되살리고 주거, 음식, 복식 등 면에서 전통문화의 맥락을 잇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도록 하였다. 이는 민족동질성 확보에 더없이 중요한 일이였다. 4. 중국조선족사회의 변화 중국조선족사회의 변화에 직접 영향을 미친 국내환경이 제1요인이라면 이 영향가운데서 중국조선족사회는 결코 얻은 것이 잃은 것보다 크다고는 할 수 없다. 중국조선족인구의 80%는 농민이다. 개혁개방으로 농촌을 기반으로 살아오던, 주요노동력인 청장년들이 대거 도시 진출하여 마음껏 재간을 부리며 생존경쟁을 확대한 반면 농촌은 인구감소로 마을이 텅텅 비고 땅이 다른 민족에게 사용권이 넘어갔다. 노동력부족으로 농촌경제의 위축을 초래한데다 농촌간부대오의 기형성으로 말미암아 농촌경제구조의 단일성을 해결하지 못하였다.6 따라서 민족교육의 위축, «풍요»속의 빈곤, 유흥문화의 부패성을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다면 제2요인으로 작용한 국외환경 - «한국바람»은 중국조선족사회를 뿌리 채로 흔들어놓은데 가세하였다. 예컨대, 민족의 동질성 유지 미명하에 국적, 족속개념혼동을 유발시켜 조선족(지성인은 제외)을 궁지에 빠뜨렸다. 중한수교이후 한국의 고국소식지와 해외동포지는 중국조선족들에 대하여 교포라고 말하지 않고 동포라고 한다는 한국정부의 의사를 간접적으로 전달한바 있다. 그러나 오늘 현재까지 언론매체에서는 여전히 교포와 동포단어를 혼용하고 있다. 중국조선족이 한국교포라면 불법체류운운은 타당찮은 처사가 아니겠는가? 중국조선족을 교포라고 일컫는 한 한국이 중국조선족을 자기 국민으로 취급하는 것이므로 현유의 수만으로 헤아려지는 불법체류자들의 한국체류는 합법적인 것이고 그들의 인신자유와 권익은 보장받아야 할 것이다. 문제는 그 교포설 때문에 동포가 피해를 입고 있음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지난날 중국조선족은 바로 그 족속문제 때문에 정치운동의 시달림을 받을대로 받았고 자칫하면 민족주의자, 특무로 몰렸었다. 지난해 불법체류 조선족들의 단식농성, 노무현 대통령의 농성현장방문은 좋이 중국정부의 민감한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라고 본다. 오늘날, 우리를 교포라고 칭하는건, 중국공민권을 부정하는 것으로 오해받게 할 여건을 제공해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설상가상으로 중국을 드나드는 어떤 한국 어른들, 지어 속세를 떠났다는 스님들까지 만주는 한국땅, 연변도 한국땅이라고 떠벌여 중국정부의 신경을 괴롭힌다. 시어미 역정에 개배때기 차면 채일 것은 또 애매한 중국조선족이란걸 이제 한국인은 알아야 할 것이다. 중국공민이면서도 몸에서 흐르는 한민족의 피 때문에, 엄연히 조상의 묘소가 있고 호적등본이 있다는 것 때문에 자기가 한국인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 조선족을 교포라 하면서도 까마귀대접이니 심리평형이 있을 수 없고 나중엔 인성을 상실하고 살인까지 하는 엄중한 사태를 초래하게 되였다. 페스카마호사건의 주모자가 원래 중국 인류영혼의 공정사 - 인민교원이였음을 감안한다면 국적과 족속개념의 혼동으로 빚어진 교훈을 당사자는 물론 한국 각자 어떻게 섭취해야 할까는 자명해질상 싶다. 중국조선족농촌총각들의 장가난 문제와 인구감소에 미친 영향도 결고 간과할 수는 없는 것이다. 1992년에 이루어진 중한수교로 하여 중국조선족에겐 의사소통을 무난히 할 수 있는 잘사는 고국에 가서 외화를 벌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였다고 한다면 한국정부에게는 한국농촌총각 장가 못가는 문제를 중국조선족사회에 전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여 준 셈이다. 곧바로 국제결혼바람이 휘몰아쳤고 한동안 가짜이혼, 위장결혼으로 국내는 물론 한국까지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다. 문제는 가짜이혼, 위장결혼의 최종적 결과가 진짜이혼 혹은 파가를 초래하였다는 점이다. 하니 이혼율은 당연 증장추세를 보이게 된 것이 아니였겠는가? 그런데 조선족 여성들로 시작된 가짜이혼대오에 최근 남성들이 가세하고 나섰다는 점도 유의할 바이다. 아내를 한국에 시집보내기 위해 서류상 가짜이혼을 하고 심지어 한국 영사관에서 오랍누이의 역할을 하고 있는 남편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조선족 여성들의 한국진출붐은 필연적으로 조선족 농촌총각들의 장가난 문제를 초래하게 되였다. 물론 농촌총각들의 장가난 문제는 농촌여성들의 대도시 진출과도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바람이 조선족혼인가정에 대한 파괴와 한국정부의 한국 농촌총각 장가난 모순전가가 중국조선족 농촌총각 장가난 초래문제에서 짊어져야 할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고 본다. 저명한 학자 정판룡 교수는 최근 연간 한국에 시집간 (정당결혼, 위장결혼 포함) 조선족 여성은 1993년에 1463명, 1994년 1995명, 1995년 7683명, 1996년 1만명을 훨씬 초과하였고 1997년에는 3월까지 이미 3000명을 초과했다. 중국조선족인구가 불과 200만명도 안되는데 이미 한국으로 시집간 여성만 해도 2만명이고 또 몇만명이 갈 것을 기다리고 있다 하니 이대로 나가다가는 앞으로 조선족사회가 계속 존재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까지 염려된다8고 하시면서 한국정부의 농촌총각장가난 모순전가가 중국조선족인구마이너스증장에 미칠 영향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우려를 표시했었다. (통계에 따르면 중국조선족생육단계에 있는 여성은 20만여명.) 또한 종교의 영향과 지역감정의 연장은 중국조선족의 불협화음을 유발하고 있다. 중국공산당의 소수민족정책하에 자치권리를 가지고 자기의 민족문화와 문자로 민족공동체를 영위해나갔던 조선족은 단합된 민족이였다. 하지만 개혁개방이래 더욱이는 중한수교이래 해외동포와의 밀접한 교류와 래왕으로 중국조선족은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 또한 적지 않다고 본다. 잃은 것 중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정체성과 단합심의 유실이다. 이에 가장 영향을 많이 그리고 심각하게 미친 것은 한국 교인들의 선교행위와 한국인들의 지역감정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우선 종교의 이심력을 지적하고 싶다.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중국조선족교회 교인들은 기독교쪽에서는 내부적으로 장로교회파, 감리교회파가 서로 갈등을 겪고 있고 천주교쪽에서는 한국천주교와 미국, 캐나다 천주교파가 줄다리기를 하면서 서로의 영향력 확대와 세력 확충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한다. 전도사, 집사, 권사들도 각자 세력범위확충에 열을 올리다보니 교인들사이 자연 반목과 불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단합된다는 교회는 실제상 자기파가 아니면 배척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으니 비교인들에게도 잘 보일 수 없게 된다. 속세를 떠났다는 한국의 한 불교 스님은 애국애족할 줄 모르는 중국조선족을 믿고 어떻게 잃은 땅을 찾겠는가고 대성질호하고 다녔다. 중국에서는 신앙자유를 허용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신앙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여러 가지 명목으로 중국에 들어온 한국 등 국외의 교수, 학자, 경영인들(실제상 목사, 전도사로서 선교를 목적으로 입주)은 신앙을 강요하여 중국조선족의 감정에 상처를 입혔다. 그 감정의 상처는 교인과 비교인의 불화와 반목을 유발시키는데 이것은 직접적으로 민족정체의 단합에 영향을 주게 된다. 한국인들은 또 알게 모르게 지역감정을 가지고 중국조선족을 획분하기 즐기며 지어 신라파냐, 백제파냐 인맥을 따지고 아니면 물을 먹인다. 이런 작법은 중국조선족에게 심히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다. 5. 변화속의 조선족 여성과 여성의 역할 중국조선족은 «소수민족정책의 보호를 받는다»는 사유방식에 수 십 년 동안 안주한데다 또한 특정된 민족제약성(농경민족)으로 말미암아 «금융, 정보, 인맥» 등 제면에서 주체민족인 한족과 평등한 경쟁을 할 수 없는 제약성도 필연적으로 가지게 되였다. 이로 하여 겪는 농촌 농민의 «삶의 위기(생존위기)», 도시주민의 «민족동화의 위기» 및 선진민족 지위상실위기 등으로 인한 갈등과 곤혹은 보다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갈등과 곤혹에서 해탈하기 위한 몸부림은 오히려 자녀의 무육과 교육, 가족의 생계를 동시에 분담하고 있는 조선족 여성들한테서 먼저 시작 되였다는 점은 주목할 바다. 즉 조선족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앞장서 «시장경제»에(비록 보따리장사로 발걸음을 떼였지만) 뛰여 들었다는 것이다. 지난해 필자는 재한중국조선족(불법) 상대로 설문 및 현장조사를 한바 있다. 조사중 한국법무부 2002년 중국조선족과 한족이 입경한 통계표를 참조하게 되였는데 역시 조선족 여성들이 체면의식을 먼저 깨고 생존경쟁에 앞장섰음을 보아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조선족은 118300명이고 한족은 105110명으로 그 차이는 13190명이다. 따라서 한족보다는 조선족의 한국 체류자가 더 많았다. 성별로 비교해보면 남성의 경우 조선족 남성은 63040명, 한족 남성의 경우는 59016명으로 조선족 남성이 4024명이 더 많았다. 그러나 여성의 경우는 조선족 여성이 63308명, 한족 여성이 46094명으로 조선족 여성이 한족 여성보다 17214명 더 많았다. 불법체류자 가운데도 조선족은 79737명이였고 한족은 69609명으로 그 차이는 10128명이였다. 그러나 성별 분포에 따르면 남성은 조선족 남성이 10994명인데 반해 한족 남성은 41593명으로 한족 남성이 조선족 남성보다 599명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고 여성의 경우는 불법체류 조선족 여성이 38743명, 한족 여성이 28016명으로 조선족 여성이 한족 여성보다 10627명이 더 많았다. 치열한 시장경제 속에서 조선족 여성들은 자신들의 개인적 가치와 다양한 생활방식에 인정받는 혜택을 누리게 되였다. 문제는 이 «혜택»이 수십년간 억제되였던 조선족 여성들의 개인욕구(금전욕, 출세욕, 명예욕 등)를 화산마냥 폭발시켰다는 것이다. 개인욕구의 분출이 사회경제발전을 촉진한 일면을 부인할 수 없지만 반면 사회통념의 변화, 가치관의 근본변화 등을 유발하였고 서방문화와 생활방식의 침투에도 무방비로 노출되였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특별히 조선족 여성의 가치관의 변화로 하여 «전통적 윤리도덕관은 파괴성적인 도전에 직면하게 되였다.»9 기존에 가정을 중시하던 전통관념은 개성을 중시하고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개인자본주의로 전화되게 하였다. 가치관이 흔들리고 선과 악의 전통적 사회윤리기준이 혼전을 가져왔으며 가짜이혼, 가짜결혼, 매춘, 사기, 밀입국 등 불법행위가 성행하는 등 인간성저하의 «만성병»이 만연되기 시작하였다. 거창한 사회흐름과 사회교제범위의 확대로 말미암아 지난날, «남녀평등»의 기치 하에 남성들과 «꼭 같은» 지위와 권리를 향수할 수 있는 제도적, 법률적, 정책적 혜택속에 참정, 의정은 물론 생산건설에서도 생력군의 역할을 무난히 감당해냈고 민족번성을 위한 출산과 육아의 사명도 완수해냈다는 긍지감속에서 살았던 조선족 여성들은 조선족사회의 변화 속에서 드디여 조선족 여성의 사회적, 경제적, 이념적 지위를 고민하기 시작하였고 여성자신의 다각색 역할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였다. 그렇다면 중국시장경제체제하에서의 조선족 여성의 다각색 역할은 어떻게 체현 되여야 바람직한가? 재래로 여성의 다각색 역할은  출산 및 생물학적인 역할  자녀양육 및 사회화의 역할  정서적 안정의 역할  경제 및 소비역할로 체현 되였다. 중국조선족 여성은 사회진출로 «기득권리와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법률적으로 보장받으면서 자아발전을 추구하는 동시에 여성자신의 다각색 역할도 충분히 발휘하였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참죽 같은 절개와 열두 폭 치마 같은 흉금, 통천하를 잉태할 수 있는 위대한 모성애로 나라를 찾기 위한 의병, 반일항쟁에는 물론 조상들이 피와 땀으로 개척하고 눈물로 걸군 이 땅을 지켜내는 생존투쟁에 직접 참여하였다.  여성의 <다각색> 역할을 천직(어쩌면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고 혼인자유와 평등부부관계를 권장하면서도 세대주의 가부장적 지위를 유지하는 끈질긴 인내심과 강인한 의지력으로 가정의 상대적 온정성과 민족공동체의 정체성 유지에 기여하였다.  적극적인 사회진출과 활발한 정치참여로 자존, 자신, 자립, 자강하는 조선족 여성의 우수성을 홍보함으로써 민족적 자존심, 자신심, 자부심을 선양하는데 기여하였다. 바로 조선족 여성들의 이러한 역할발휘로 말미암아 조선족사회가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고 필자는 믿어마지 않는다. 그렇다고 굳이 잘 지켜내고 있는 것 또한 아니여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 이혼율의 급장성 추세10를 들 수 있다. 조선족 여성들의 정조관념이 점차 약화됨에 따라 사람들은 정당한 리혼을 동정하며 합리한 재혼에 축하를 표시한다. 전통적 사고 즉 <평생 하나의 남편밖에 섬기지 못한다>, <과부는 다시 시집가지 못한다>는 관념은 이제 옛말이 되고 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났으면 과감히 법에 의하여 재가할 수 있고, 쌍방의 감정이 맞지 않으면 이혼을 할 수도 있다.  모친 가출, 가정해체와 청소년 범죄율 증가하고 있다.(2001년 훈춘시 미성년범죄건수 36건, 65명, 2002년 원고 발표 일까지 배로 증가.) 모친 가출과 가정해체가 증가하면서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의 청소년들은 부모와 갈라져있는 생소한 환경에서 산만해지는 등 많은 문제에 봉착하고 있다. 출국가정의 자녀교양에서의 문제점은 소학교 고급학년이나 중학교 단계에서 더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아직 자기 앞날에 대한 뚜렷한 목표가 없이 방황하는 청소년들이기에 시비에 대한 식별능력도 낮으며 자칫하면 빗나가고 있다.  해외진출과 섭외혼인이 늘고 있다. (1992년-2001 47565건) 섭외혼인도 놀라운 수를 보여주는데 조선족이 제일 많이 살고 있는 용정시(60%이상이 조선족)만 보더라도 2000년 1월부터 10월까지 무려 650명 여성이 외국으로 갔고 그중 조선족 여성이 95%이상이며 또 70%이상이 30대라고 한다.  인구마이너스증장13이 나타나고 있다. 전통적 출산관념은 타파되고 새로운 출산관이 젊은 세대들속에 자리잡게 되였는데 그들은 자기 세대의 성공과 향락을 추구하면서 아이를 하나이상 더 키우려 하지 않는다. 하나라도 잘 키우면서 자기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연변 조선족은 해마다 혼인생육연령 여성이 1000명 정도 줄어들고 있는데 김정애14는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연변 조선족에게는 예로부터 당의 호소에 적극 향응하는 우량한 전통이 있다. 그것은 해방전쟁, 항미원조 등 역사가 증명해준다. 이는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시사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이런한 특성은 일부 좌적인 경향을 땔 때도 있다. 이를테면 70년대 초에 국가에서 아이를 적게 낳을 것을 제창했었다. 하지만 행정수단적인 통제는 없었다. 연변주 산아제한위원회도 70년대 말인 1979년에 그 간판을 내건 형편이였다. 하지만 연변 조선족들은 벌써 70년대 초부터 아이를 적게 낳기 시작했다. 당연히 지금에 이르러 아이 엄마가 될 여성이 줄어드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 개혁개방 특히 80년대 말부터 농촌 처녀들이 대량 도시에 진출하거나 외국 노무로 떠나버리는 통에 농촌에는 처녀가 없어 총각들이 결혼하지 못하는 현상이 이미 사회적인 초점으로 형성되였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1996년 말 용정시 농촌의 총각 처녀 비례가 20:1이였는데 올 상반년에 이르러서는 22:1로 대폭 증가되였다. 백금향의 총각 처녀 비례는 57:1로 기록되고 있다. 처녀가 없으니 총각들이 장가들지 못하고 결혼하지 못하니 아이가 없기 마련이다. 따라서 촌 소하교, 향 중학교들이 매일같이 마사지며 마을에 총각들뿐이니 술 마시고 도박 놀며 종일 바자테에 둘러서서 한숨만 쉬는 현상, 사회치안 등 일련의 사회적인 문제점들이 속출되고 있다. 처녀들이 국내 도시로 진출하여 조선족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다. 조선족이 절대치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족과 결혼하여 한족 아이를 낳는다면 문제는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외국노무 등으로 출국했다가 돌아오지 않고 외국 사람과 결혼하면 우리 중국 조선족의 수는 역시 줄어드는 것이다. 셋째, 한국에 시집가는 처녀들이 날로 증가되고 있다. 지난해 연변주 섭외혼인등록처에 와 법적인 결혼 수속을 밟고 한국에 시집간 조선족 여자만 해도 2400명, 그것은 해마다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 몇 해사이의 그 합계는 또 얼마인가? 우리는 숱한 처녀를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중국조선족공동체가 안고 있는 «전통적 윤리도덕관이 파괴성적 도전에 직면»하였다고 대성질호 하는 것도 남성가치관기준으로 지적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여성들에게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책임론»에 앞서 조선족남성들이 중국조선족 여성들을 남성가치관기준이 아니라 여성의 존엄, 평등권리, 개체의 충분한 발전과 사회지위향상을 전제로 재평가하고 인정하여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조선족 여성들은 조선족인구마이너스국면을 해결하기 위한 출산의무(2태 생산)를 완수하는 사명의식을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다음 조선족사회는 «여성을 지키는 것으로 가정을 지키고 가정의 안정을 지키는 것으로 민족공동체진흥에 일조 한다»는 의식을 확실히 수립하여 조선족 여성들의 정서적 안정의 역할, 경제 및 소비의 역할도 동시에 충분히 발휘되도록 여건을 창조하여야 할 것이다. 아울러 조선족 여성들은 민족의 공동 이익으로부터 출발하여 조선족남성들이 정상의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는데 일조하는 자세로 역할분담 강조보다는 «자아희생»정신을 발휘하는 자세가 필요함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한 것은 중국이란 대환경에서 조선족남성의 사회적 지위의 정립이 없이는 여성 군체의 입지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족 여성의 역할발휘와 함께 조선족 여성단체의 역할발휘도 간과 되여서는 안 된다고 필자는 인정한다. 조선족 여성단체는 우선 조선족 여성 군체가 더는 공농병상학이란 간단한 직종으로 구분되는 군체가 아님을 인식하여야 한다. 즉 오늘날의 조선족 여성 군체는 여전히 사회자원을 상대적으로 적게 점유한 약소 군체임을 인식해야 한다. 약소 군체라고 함은 상당수 조선족 농업노동자계층, 상업봉사인원계층과 도시 무직업, 실업과 반실업계층이 대거 포함 되여 있기 때문이다. 이 약소 군체를 전업기술인원계층, 상업봉사인원계층과 경리계층, 사영기업주계층에로의 전입을 시도하는 교육시스템을 구축하고 질적, 양적으로 보장된 여성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리더십 양성센터(혹은 강좌)를 구축하는 것 역시 여성사회단체의 소명으로 되여야 할 것이다. 여성사회단체의 사회조류에 순응하는 능력의 발휘, 참신한 사교활동, 봉사활동, 학습활동들의 조직 등은 기필코 여성의 자질을 제고하고 그 역할의 효과적 발휘에 일조하게 될 것임은 틀림없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여성사회단체는 우선, 대 국면을 파악하고 시대발전의 맥락에 순응하며 자체발전의 법칙을 탐구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둘째, 장원한 관점에 입각하여 조선족 여성의 생존, 보호, 발전의 대사를 관심, 의논하는 목표와 방침을 제정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현장조사, 설문, 통계수치를 안받침한 조선족 여성, 조선족 가정 및 조선족 여성백년사 연구시스템 구축을 목적으로 한 가정연구소가 창립 되였고 «여성을 잃으면 민족을 잃는다»는 위기의식하에 조선족 여성평생교육프로그램 추진을 위한 중국조선족 여성개발원(주비)이 발족 되였다.) 셋째, 단계목표를 설정하고 힘을 집중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넷째, 조선족 여성들이 제일 관심하는 일이 무엇임을 파악하고 실제문제를 착실히 해결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다섯째, 실효를 따질 줄 알아야 한다. 6. 맺는말 2002년, 중국사회과학원에서 공포한 «당대중국사회계층연구보고»는 중국은 현대사회계층결구를 기본 확립하였다고 명시하였다. (注: 중국의 10대 계층-국가와 사회관리계층, 경리계층, 산업노동자계층, 농업노동자계층, 사영기업주계층, 전업기술인원계층, 사무인원계층, 개체공상호계층, 사업봉사인원계층과 도시 무직업, 실업과 반실업계층) 당면 중국조선족사회 구성원도 당연 이 계층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문제는 여러 계층으로 구성된 조선족사회를 진흥시키는 사회적 역할을 여성도 분담하는 것으로 조선족 여성은 출산과 육아 외에도 가정에서의 다각색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민족이 여성의 «희생»정신을 촉구,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기에 조선족 여성은 사회일원으로서 짊어져야 할 의무를 감당해야 할 각오, 그 의무를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소질제고에 모를 박고 자신을 한 차원 제고시켜야 한다. 한 것은 21세기 세계적 범위의 경제, 문화와 과학기술의 경쟁은 종국적으로 민족소질의 경쟁으로 될 것이고 또한 여성의 소질은 직접적으로 민족소질에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1. «민족과 평화», 오상순, 2000年.2. «當代中國三次思想解放全錄,» 鄭剛 主編, 中共黨史出版社, 1998年.3. «女性群体正在變化», 中國婦女, 2003年 8月.4. «지난날의 이야기 누구와 하랴», 김학척, 민족출판사.5. «동북특집», 2003년 11월.6. «중국조선족사회의 변화와 21세기 대안적 발전전략», 리동춘, 차이나코리아닷컴.7. «중국조선족가정문제에 대한 사고», 박민자, 1998년 7월.8. «인격과 자존만은 지켜야 한다», 정판룡, «연변녀성», 1997년 9월.9. «조선족사회에서의 한국의 영향과 과제», 박민자, 2000년 7월.10. «2000년 통계: 이혼율 32.5%»11. 2001년 5월 21일 연변일보12. 2001년 한국 법무부 통계자료13. «중국조선족현상태분석 및 전망연구», 박민자 주필, 연변대학출판사, 2004년 4월.14. «문화산맥 3», 김정애, 흑룡강출판사,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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