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후 재만 조선인들의 잔류와 국적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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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992회 작성일 2008-11-19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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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재만 조선인들의 잔류와 국적문제 손 춘 일 연변대학 민족연구원 원장, 교수 머리말 광복 후, 재만 조선인은 한반도로 귀환하느냐 아니면 중국에 잔류하여 계속 살아가야 하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게 되었다. 국민당 수복지역에서는 조선인을 “한교(韓僑)”라고 지칭하고 그들의 재산을 일본과 위만주국 재산의 일부로 취급하고 강제적으로 압수하여 최저한도의 생존권마저도 박탈하였으며, 많은 조선인들은 할 수 없이 한반도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중국공산당은 동북해방구에서 여전히 조선인을 중국소수민족의 하나로 간주하고 민족평등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심지어 토지소유권마저도 부여했다. 이는 해방구에서 많은 조선인들이 계속 동북에 잔류하고 한반도로 돌아 가지 않은 가장 주요한 원인 하나이다. 본 문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중국 공산당의 조선인에 대해 어떠한 국적정책을 실시했는지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1. 광복 후 재만 조선인에게 놓인 선택 항일 전쟁이 끝난 후, 국공 두 당이 동북을 쟁탈하는 국면이 날로 치열해 짐에 따라 재만 조선인들은 미래에 대한 선택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비록 일제가 항복하여 광복을 맞이하긴 했지만 위만주국시기 일본이 조작한 열악한 민족관계로 자칫하면 재만 조선인들에게 또 다른 재난이 닥쳐오기 때문이다. 당시 국민당동북행원과 "정치토비"들이 재만 조선인에 대한 박해가 날로 심각해지는 상황 속에서 재만 조선인들에게는 아래와 같은 네 가지 선택이 가능하였다. 첫째, 중국공산당을 따라 평화롭고 민주적이며 독립적인 새 중국 건설에 참여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대다수 동북 조선인들의 주장이기도 하였다. 광복 후, 재만 조선인들의 출로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문제는 대다수 조선인들의 고민이었지만 바로 이 점에서 많은 조선인들의 동감을 얻었던 것이다. 1945년 8월 22일, 즉 소련홍군이 길림시에 온 지 나흘이 되는 날, 량환준 등 여러 조선인들은 “길림조선인민해방동맹”을 조직하여 국민당이 지지하는 한국교민회와 이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다. 여기서 량환준 등은 “오직 중국공산당의 영도 하에 단결하고 민주 자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고 휘황한 새 중국을 건설해야만 중국인민의 전도가 광명하며 따라서 중국 조선인들도 전도가 광명하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는 대다수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던 것이다. 그 해 11월 3일, 심양에서 열린 중국동북행정위원회 임시대표회의에 재만 조선인 대표들도 참석하였다. 그들은 이 기회를 빌리어 심양 서탑에서 별도로 회의를 소집해 조선인들이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으로 되고 정권건립문제에도 참여해야 하는가 하는 등 여러 문제를 둘러싸고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여기서 요녕성과 흑룡강성 대표들은 모두 민족자치 제강을 제출하였고, 이에 대해 길림성 대표 량환준은 아래와 같이 말했다. “현재 국민당 장개석은 승리의 전취물을 빼앗아 미친 듯이 내전을 준비하고 있어 중국은 광명과 암흑, 이 두 가지 운명적인 결책에 직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민족자치문제는 너무 이르다고 본다. 우리는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으로서 반드시 중국공산당의 영도 하에 우선 건정(建政), 건군(建軍) 사업에 참여하여 장개석정권을 타도하고 새 중국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하여 이 주장은 조선인 대표들의 지지를 얻었다. 둘째, 재만 조선인들 가운데, 특히 민족주의 단체 그리고 일본과 위만주국 관리, 군경 등 전과가 있고 또 지주 성분 혹은 많은 자산을 가진 사람들은 강력히 장개석과 국민당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현지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정통” 관념이 강하여 국민당을 따라야만 잘 살수 있다는 환상을 품고 있었던 부류인 것이다. 물론 그들의 정치적 입장에서 이런 선택은 당연한 것이다. 예컨대 1945년 8월말, 할빈시 조선인 금강소학교에서 금후 재만 조선인들의 출로문제로 진행한 토론회의에서 국민당을 지지하는 고려청년단 단장 권영조 등은 강력하게 소련을 반대하고 공산당을 반대하며 장개석을 옹호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해 9월, 위만주국시기 길림 조선민회 회장을 역임하였던 리대성과 친일파인 리룡조, 그리고 국민당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교민회 신숙 등은 돈화, 교하, 서란, 화전, 장춘 등지의 조선인대표 500여명을 불러 길림시 조양가 조선인소학교에서 회의를 열어 재만 조선인민이 국민당을 따를 것을 거듭 요구하였다. 물론 그들의 요구는 “길림조선인민해방동맹”의 강력한 저지를 받았다. 셋째, 또한 일부 사람들은 공산당을 도와 북조선에서 정권을 장악하고 독립적이고 인민이 주인으로 된 새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재만 조선인들의 유일한 출로라고 주장하였다. 1946년 9월, 하얼빈시에서 개최한 북만지구조선인민주련맹회에서 “조선인민주련맹행정강령”을 통과시켰다. 이 강령 제4항에서 규정하기를 “조선국내 민주운동을 지원하여 조선의 완전 독립을 쟁취하며, 신민주주의 조선을 건립하기 위해 기여하여야 한다”고 했다. 물론 이 강령에는 직설적으로 재만 조선인들은 북조선에 돌아 가야한다고 의사를 명확히 표시하지 않았지만 “강령”속에 적혀져 있는 이런 구절들은 북만지구 조선인들이 북조선사회주의건설을 위해 기여하려는 강렬한 염원을 반영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으로 인해 1948년 8월, 중공연변지구위원회는 조선인들 속에 이런 염원이 존재한다고 더욱 명확히 지적하였다. 즉 “조선민족 인민 속에 일부는 ‘국민’과 ‘동포’를 분간하지 못하며 또한 한 몸이 두 나라에 속한다고 여기고 있다. 그들은 언제든지 북조선으로 돌아 갈 수 있고 정부가 제한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고 여기며, 심지어 불만을 품고 일부 작은 문제에 대하여서도 당의 정책에 의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조선인 대학을 창립하지 않는다거나, 또는 백지로 중문 서류를 인쇄하고 그보다 못한 용지로 조문서류를 인쇄한다는 등등 이다. 일부 간부 당원들은 북조선으로 돌아가 사업할 것을 요구하며 연변에 남아 있는 것을 싫어한다. 그리고 연변조선민족가운데 일부 사람들은 북조선을 조국으로 보는 관념이 있다. 이는 과거 역사적으로 북조선과 경제적으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연계가 있었고 정치, 사상, 종교, 그리고 가족관계에 있어서도 일정한 연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청년학생, 지식인들 속에 편파적 조국(북조선)관념이 비교적 농후하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부분적 재만 조선인민들이 조선으로 돌아가려는 다른 한 염원이 반영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일부분 재만 조선인들은 남한으로 돌아가 장개석 국민당과 손잡고 “중한 합작”을 실행하기 희망하였다. 위만주국시기 수도인 장춘에는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위만주국정부 관리, 직원들로 취직하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서도 상당한 조선인들은 친일분자였다. 일본이 투항하게 되자 그들은 공개적으로 이승만을 지지한다고 선언하고 “고려청년회”, “고려독립회”, “한교청년회”, “한교국민당”등 여러 단체를 조직하여 남한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예컨대 항전이 결속될 때 요녕성 개원현에 2000여 호의 조선인 민간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을 상대로 원 조선 평안남도 박천군 군수 박익성, 위만주국 협화회 핵심인물인 최경국, 그리고 위만주국 경찰 이종순 등은 “한국민단”, “한국청년단” 등 단체를 조직하여 조선인들은 남한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부추겼다. 그들은 1945년 9월 10일 개원에서 현 내 각 마을 조선인농민대표가 참가한 회의를 소집하여 “한국민단계약”을 통과시키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많은 조선인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사실 이런 상황은 당시 동북 국민당수복지역에 비일비재하였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바 광복 후, 재만 조선인사회 내부에서는 계층, 성분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따라 서로 다른 정치적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많은 재만 조선인들은 중국에 대해 두터운 감정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의연히 “조선은 나의 조국”이라는 의식이 강했다. 2. 재만 조선인에 대한 중공 인식의 변화 중공 제6차 전국대표대회이래 중국공산당은 줄곧 동북에 정착한 조선인들을 중국경내의 소수민족으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항일 전쟁이 끝난 후 국민당은 동북에 거주하고 조선인들을 “한교”라고 지칭하면서 그들의 재산을 일본과 위만주국 재산으로 취급하고 동결, 강탈하는 동시에 한반도로 돌아가라고 강요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통”관념이 강한 당지 일부 토착민들도 재만 조선인들의 사회적 신분과 법적지위에 대해 의심을 하고 상당한 오해가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바로 이런 현지 토착민, 심지어 공산당 내부에서도 존재하고 있는 일부 그릇된 인식을 수정하고 재만 조선인들의 사회적 신분과 법적지위를 보장하며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주보중은 재만 조선인에 대해 강조하기를 “1945년 9월 말, 중공중앙 동북국에서 이미 동북조선민족문제를 주의하고 있었으며, 화북에서 항전에 참가한 의용군을 제외하고 중국경내에 거주하고 있는 기타 재만 조선인들을 일반적으로 중국경내의 소수민족이라고 여겨왔다. 장춘에서 초기의 길(림)합(강)양성지구 당위, 그 후의 길림공위와 길(림)요(동)성위는 바로 이 정책으로 조선인들을 영도하였다.” 그는 또 “동북과 연변지구의 조선주민들은 기타 소수민족들에 비해, 비교적 뛰어난 농업노동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높은 문화수준과 조직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정치사상도 비교적 진보적이다. 특히 오늘 날 전체 조선민족을 해방하는 귀중한 환경이 재만 조선인들의 민족 자존심을 강화하게 하고 절대로 대한(大漢)민족들에게 동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여 주었다”고 명확히 지적하였다. 그리고 “당이 비록 현재 새 환경에서 조선민족의 지위를 명확히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실제상 조선인—소수민족이란 평등정책을 실시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꼭 발전해 나갈 것이다”. 이는 해방초기부터 중국공산당은 중국조선인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 연변조선인들의 소수민족지위에 대해 중공 연변지위에서도 1948년 8월에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우리당과 정부에서 중국경내 조선민족들의 소수민족지위를 비준하였으며, 이것은 매우 정확한 것이다. 해방 후에도 이 정책을 계속 관철해 나가야만 조선민족들도 실제경험 중에서 중공에 대한 인식과 신앙을 제고할 수 있으며, 중공을 그들의 민족해방과 인민해방의 구세주라고 여길 것이다.” 연변지위에서는 또 동북조선민족이 동북변강건설과 항일투쟁에서의 헌신적인 공헌에 대해 아주 높게 평가하였다. 즉 “조선민족은 소련, 조선 그리고 중국혁명의 영향, 특히 중국공산당의 영향을 받은 데다 일제와 중국군벌지주관료의 압박을 많이 받았다. 그리하여 연변지역에서 그들은 기타 민족들보다 더욱 확고한 혁명성이 있으며, 수차례의 혁명투쟁을 거쳐 혁명경험과 투쟁 조직성 그리고 문화방면에서도 다른 민족보다 한 차원 더 높다”고 하였다. 1948년 12월 9일, 연변지위 서기인 류준수는 이렇게 지적하였다. “연변 경내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들을 확정짓고 중국경내의 소수민족이며 중화민주공화국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승인하여야 한다.” 북만 당 조직에서도 조선인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상당한 정치 권리를 부여하였다. 1948년 11월 21일, 중공 송강 성위서기 장책이 송강성 현위서기회의에서 한 보고 연설 “건설문제에 관한 총결”에서는 아래와 같이 명확히 지적하였다. “조선인들이 토지를 분할 받고 군대에 참가하였으면 일반적으로 소수민족문제로 처리해야 하며, 선거에서도 조선인과 한족은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모두 조선인인 마을에서도 반드시 마을과 구로 통일적으로 영도하고 통일적인 정령을 집행해야 한다. 한족과 조선인이 잡거할 경우, 주민의 인수에 따라 당선될 위원이 얼마인가를 확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조선민족문제를 처리할 때 반드시 신중해야 하고 민족적 편견이 없어야 하며, 각 민족의 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다시 말해 해방전쟁시기 중국공산당은 동북에 거주하는 조선민족은 중국경내의 소수민족이라는 점을 반복적으로 지적하였으며 사회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재만 조선인들의 신분에 대한 오해를 해소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3. 재만 조선인에 대한 중공의 國籍정책 해방전쟁시기 중국공산당은 동북경내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들의 소수민족지위를 확립하고 그들의 사회적 신분을 보장하였다. 하지만 재만 조선인들의 민족적 감정을 헤아려 그들이 법적으로 국적을 어떻게 선택하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종래로 왈가왈부하지 않았으며, 그들 스스로 국적을 선택하도록 하였다. 1948년 연변지위에서 이렇게 지적하였다. “조선인들이 중국경내로 이주해 들어온 이래 오랫동안 일본과 중국 지주군벌들의 잔혹한 압박과 착취를 받아 왔으며, 3대 이상 중국 경내에 거주하고 있지만 여전히 조선조국에 대한 사모는 아주 깊다”. 즉 조선인들이 한반도에 대해 갖고 있는 깊은 정서를 우선 긍정한 것이다. 사실 이런 원인으로 해방초기 재만 조선인 국적문제도 쉽게 해결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렇기에 중국공산당은 조선인들에게 국적 선택의 자유를 주었고, 또 이와 관계없이 정치적으로 그들에게 상당한 권력을 주었다. 예컨대 1945년 11월 중순, 목단강시에서 인민정부를 성립하자 조선인인 김동렬을 부시장으로 당선시켰다. 1946년 2월25일 목단강시에서 임시참의회의를 열었다. 여기 102명 참의원 중 21명이 조선인이었고, 12명 정부위원 중 2명이 조선인이었다. 1946년 2월 22일, 가목사에서 모집한 합강성 제1차 인민대표대회에서 이연록이 이렇게 지적하였다. “과거 소수민족들은 압박을 받고 통치자한테 착취를 받는 의무만 있었지 언론과 자기 이익을 위해 보호하는 권리가 없었다. 오늘 이 대회에서 조선인과 몽골족이 소수민족을 대표하여 연설을 하는데 이는 동북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다.” 그리고 1946년 8월, 하얼빈에서 동북 각 성、시 대표연좌 회의가 열렸는데 선거를 통해 동북 각성、시 행정연합사무처 행정위원 원림풍 등 27명을 뽑았다. 그 중 조선인인 김광협도 위원으로 당선되었다. 1948년 9월10일, 동북행정위원회 민정부에서 발표한 “선거사업에 관해 각 성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제기하였다. “민족이 복잡한 지구에서 일부 조선인과 몽골족들이 한 개 현, 한 개 구, 한 개 촌에 거주하고 있다. 선거 중 이런 상황에 대해 주의를 돌려야 하며 선거 방법, 선거구의 나눔과 공민자격을 확정하는 등 문제에 있어서 민족의 구체적 상황에 따라 결정하고 경험을 얻어야 한다.” 특히 재만 조선인들의 국적문제에 대하여 1946년 1월1일 연변전원공서부전원인 동군이 “새해에 드리는 글”이란 문장에서 처음으로 이렇게 강조하였다. “현재 우리 연변지구에 민주정권이 건립된 이래 의심할 바 없이 연변지구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도 정부의 법령을 준수해야 하지만 또한 정부 법령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중국국적에 가입하기를 원하는 한국인은 입적할 수도 있고 중화민국의 국민으로도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조선인은 중화민족소수민족의 일원으로 될 수 있다. 우리 정부는 민족평등 원칙하에 조선인들이 정치와 경제, 문화상에서 해방과 발전의 권리를 가지게 하며 민족 언어문자, 풍속습관, 종교 신앙 등도 일률적으로 존중 받는다”. 이는 중국공산당이 처음으로 중국소수민족개념과 국적문제를 같이 토론하고 동시에 조선인입적문제를 명확히 규정하고 자원의 전제하에 입적하는 것을 동의하였다. 다시 말해 중국공산당은 법적으로 조선인들에게 커다란 권한을 주고 “자원”이란 원칙하에 조선인들에게 최대한의 국적 선택여지를 준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보아서도 중국공산당이 조선인민에 대한 극진한 배려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특히 분명한 것은 중국공산당도 재만 조선인들이 감정적으로 조선과 중국은 “하나의 아버지 어머니”로 여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중공연변지위서기 유준수는 “이쪽도 나의 조국이요, 저쪽도 나의 조국이다”. 라고 하는 상황에서 반드시 조선인들의 민족감정을 존중하고 충분한 선택의 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해방초기 중공이 실시한 조선인 국적 정책에서 더욱 지적해야 할 점은 심지어 “이중국적”이란 관용정책까지 실시하려고 하였다는 점이다. 즉 “그들이 동시에 두 개의 국적을 가질 수 있도록 승인할 수 있다. 지금 중국국민으로서 중국국민의 일체 권리를 향유하고 중국인민해방전쟁에 참가한다. 그러나 일단 조선이 외적의 침범을 받았을 때, 만일 그들이 원한다면 수시로 조선공민의 신분으로 조선에 들어가 반침략전쟁에 참가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현재의 급박한 문제도 해결하고 동시에 그들의 감정도 상하지 않게 한다.” 비록 “이중국적”문제는 후에 실현되지 않았지만 중국공산당의 이런 대담한 가설은 확실히 중국공산당은 조선인 국적문제에 있어서 상당한 우대정책을 실시하려고 하였다는 점은 의심할 바 없다. 물론 중국공산당도 이 시기 관리 편리상 중국공민과 조선교포 문제에서 명확한 원칙이 없는 것은 아니며 그 개념도 비교적 엄격히 구분하여 의무와 권리를 부여하였다. 1948년 8월, 이 개념에 대해 규정하길 “연변조선인민 등기호구에 호적이 있는 자는 모두 공민이고, 잠시 내왕하고 호적이 없는 자는 교포이며, 정부의 비준을 받아 외국에 가 거주하던 공민이 돌아 와도 교포이며, 북조선에서 우리 고급정부의 비준을 받지 않는 자는 모두 교포이다. 공민의 가족이 조선에 있지만 가장과 재산이 모두 연변에 있어 정부의 허락을 받고 오는 자는 공민으로 승인한다. 공민과 교포는 권리에 있어서 구별할 수 있다.” 그해 12월, 연변지위서기 류준수가 또 이렇게 강조하였다. 즉 “과거 연변지구에 거주하고 토지개혁 중 이미 당지 민주정부에 정식으로 호적을 가입한 자는 중국의 공민이다. 정식으로 호적에 가입하지 않거나 새로 조선에서 온 자는 조선 교포이다. 공민과 교포는 의무와 권리에 있어서 엄격한 구별이 있으며 이 구별에 근거하여 중국경내에 입적한 조선인민과 조선 민주공화국의 관계는 동일한 민족이 두 나라에 거주하는 중국과 조선의 우의관계이다. 때문에 중국경내에 입적한 조선인민은 모두 중국공민의 대우를 받으며 조선동포로 보아서는 안 된다.” 바로 이런 원칙하에 중국동북에서 토지개혁을 진행하던 시기, 많은 동북 조선인들은 중국국적에 가입하여 토지소유권을 향유하였으며 중국소수민족의 일원으로 되었다. 맺는 말 1949년 9월 전국정치협상회의 제1차 회의가 북경에서 열리였으며 이 회의에 조선족대표도 정식 대표로 참석하여 중국조선족이란 법적위치를 다시 확인하였다. 중국공산당 당보 《인민일보》도 조선족대표가 전국정치협상회의 참가한 사실에 대해 매우 높게 평가하면서 동북에 거주하는 있는 120만 명 조선인들은 이로부터 중국경내 소수민족으로 되었다는 점을 다시 지적하였다. 다시 말해 이로부터 재만 조선인들은 중국 56개 민족의 하나로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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